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덴무 덴노 (문단 편집) === 외교 === 덴무 천황이 진신의 난을 일으킨 것은,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 장군의 자격으로 왜국에 파견되었던 [[당나라]]의 사자 곽무종(郭務悰)이 5월 30일에 귀국하고 나서 약 한 달이 지난 6월 22일의 일이었다. [[백강구 전투]] 패전으로 한반도에서 백제부흥운동이 끝난 뒤, [[신라]]가 [[나당전쟁|당군을 몰아내기 위한 전쟁]]을 벌이는 한편으로 일본과 통교하여 외교적인 여건이 약간 호전되고 있었다. 일본은 당과 [[신라]]가 힘을 합쳐 일본으로 쳐들어오는 것을 경계했고, 신라도 당과 싸우는 동안 일본이 뒤에서 귀찮게 구는 것을 경계했으므로, 신라와 일본이 서로 친하게 지낼 동기가 생긴 것이다. 기록된 것만 보면 덴무 천황은 신라와 여러 차례 사신을 주고받은 반면 당나라와는 별로 사신을 주고받지 않았다. 신라뿐 아니라 [[탐라국]]에서도 사절이 왔고, 684년에는 탐라국으로 견탐라사를 보내기도 했다. 급변하는 동아시아 정세 속에서 외교 다각화를 적극적으로 시도한 흔적이 엿보인다. 서쪽 한반도뿐 아니라 남쪽 너머와 동쪽 너머의 이민족에 대해서도 조치를 취했는데, 11년(682년) 7월 25일에는 [[가고시마]] 남쪽에 있는 다네(多禰, 지금의 [[다네가섬]]), [[야쿠 섬]](掖玖), 아마네(阿麻禰)의 섬 사람들에게 녹이 내려졌다. 동북쪽 [[도호쿠]]에서는 11년(682년) 4월 22일에 고시(越)의 [[에미시]](蝦夷)의 땅 이코키나(伊高岐那)에 고오리(評)를 두었다. 보통 친백제적 성향의 형인 덴지 천황과는 달리 친신라적 성향을 가졌던 것으로 평가받는다. 사실 백제는 본국이 사라졌고 신라가 어찌됐든 한반도를 [[실효지배]]하기 시작했으므로 더 이상 예전처럼 백제와 친하고 신라를 적대하기만 할 수는 없는 상황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신라계 도래인을 훨씬 우대하지도, 백제계 도래인을 너무 푸대접하지도 않았다. 덴무 2년([[673년]]) 윤6월 6일에 사택소명(沙宅昭明), 3년([[674년]]) 1월 10일에 구다라노고니키시 사이쇼(百濟王昌成)에게 관위를 추증했으며, 14년([[685년]]) 10월 4일에는 옛 백제의 승려 상휘(常輝)에 대한 봉호 30호 지급 등 백제 유민에 대해 많은 혜택을 주고 있다. 그리고 한반도로부터 귀화한 [[도래인]]에게는 자신의 원년(674)부터 10년(681)까지 과세를 면제해 주었고, 10년이 지난 8월 10일에는 입국할 때에는 아이였던 자들에게도 면제해주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